부여의 여행명소 중 정림사지는 과거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부여에 위치한 정림사지 박물관은 백제시대 중 가장 화려했던 불교유적 등 백제의 땀이 담긴 곳입니다. 백제의 불교문화를 재조명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고취시키고자 건립되었으며 방문하여 불교의 역사를 여행해 보시길 바랍니다. 부여 정림사지를 방문하시기 전에 정림사지에 대해서 미리 숙지하고 방문하시면 관람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포스팅에서는 부여 정림사지의 의의, 발굴조사 과정, 문화유산에 대해서 작성해 보았습니다.
부여 정림사지의 의의
정림사지는 부여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는 사찰을 바로 정림사라고 합니다.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백제 왕조의 명운과 직결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습니다. 정림사지의 대지는 북동에서 남서로 경사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높은 북동쪽은 깎아내고 낮은 서남쪽은 성토하여 조성하였습니다. 주변에는 동쪽으로는 금성산과 북쪽으로는 부소산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정림사지를 조사한 결과 백제시대의 중문, 금당지, 강당지 및 승방지, 회랑지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승방지의 배치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독특한 모습으로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났습니다. 사찰의 중심이 되는 공간에는 불상이 안치되는 금당과 부처의 사리가 봉안되는 탑입니다. 정림사지는 강당과 승방지, 회랑으로 둘러진 공간 안에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열하는 전형적인 백제시대 사찰터로 각 건물들은 기와로 쌓은 기단 위에 건축된 목조 건물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정림사지의 윤곽을 확인하였으며 현재는 정림사지 5층 석탑,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는 강당이 있습니다.
발굴조사 과정
정림사지의 발굴은 1915년 일제는 고적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고적조사 5개년 사업을 추친했습니다. 조사대상은 석불좌상과 정림사지 5층석탑이 포함되었으며 당시 보고서에는 소정방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1942년 총독부박물관의 후지사와 카츠오에 의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발굴이 중문지와 금당지는 전면 발굴을 했고 강당지는 주로 적심석의 위치만 확인하였습니다. 백제의 중심이었던 부여의 부소산 일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6월 3일에 백제시대 궁전벽화가 발견되었고 6일에는 왕궁지와 기타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어서 9월에는 대가람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10월 초에는 평제탑 부근에 발굴이 계속되었는데 대가람의 사지가 확인되었고 법당지에서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습니다. 1979년부터 1984년에 걸쳐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정림사지의 윤곽을 확인하고 주요 건물배치가 일직선상에 건립되어 있으며 건물들을 회랑으로 감싸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2008년에서 2009년 조사에서는 석축배수로와 강당지, 서편으로는 건물지 공방 관련 유구, 고려시대 금당지 등 정림사의 가람배치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2010년에는 고려시대 정림사 관련 적심석군이 확인되었으며 금당지와 탑지사이에서는 창건 이전 목탄층이 확인되어 창건 이전의 생활면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유산
정림사지의 문화유산으로는 정림사지 5층석탑, 석조여래좌상이 있습니다. 각각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정돈된 형식미와 세련된 완숙미를 보여줍니다. 백제의 장인들은 기존의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선택했고 석탑을 표현함에 있어서 목조탑을 재현하기에 그쳤으나 시간이 흐르고 석재의 가공적 용이함을 위해 규모를 축소하고 세부 형식을 간략화하여 정림사지 석탑이 축조되었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의 구조는 여러 장의 석재를 사용하여 단층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면석의 각 면에는 귀퉁이 기둥돌과 지탱하는 돌을 하나씩 세웠습니다. 지붕돌의 아래 면에는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된 2단의 지붕받침을 두었는데 탑신과 마찬가지로 위층으로 갈수록 석재의 수가 줄어듭니다. 탑과 탑을 둘러싼 건물들의 배치와 구성은 매우 정교한 수치에 의해 구성되어 아름다워 보이고 자세히 알지 못하는 수리적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석조여래좌상은 5층석탑과 남북축선상에 놓여있습니다.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서 얹어 놓은 것입니다. 신체는 파괴와 파손으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서 자세한 양식과 수법은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은 지권인을 표현하는 것으로 추청 하는데 지권인은 비로자나불의 특징적인 손모양으로 불법으로서 모든 것을 감싼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불상이 봉안된 곳은 백제시대 정림사의 강당 자리로 여기에서 발견된 명문 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지을 때 세운 것으로 추청 됩니다.